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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불교] 불교사상의 융합 쇠퇴기
글쓴이 : 용화사 날짜 : 2006-03-14 (화) 17:04 조회 : 2468


불교사상의 융합 쇠퇴기



10세기경 중국에서는 귀족이 지배하던 준(準)봉건 제도는 쇠퇴하고 점차 관료제도가 그 중심을 차지하게 되었다. 관료제도에서 정부의 관직은 경쟁이 극심한 시험제도를 통해 모집된 보다 큰 집단의 구성원인 문관들로 채워졌다. 이 새로운 상류계급은 생활방식이나 문화적 표현에 있어서 매우 세련되어 있었다.

같은 시기에 경제의 중심은 건조하고 전쟁으로 신음하는 북부로부터 쌀이 풍부하게 생산되는 중부와 남동부지역으로 점차 옮겨 갔다. 거대한 도시들은 문관과 부유한 상인들로 이루어진 지식층이 공유하는 독특한 도시문화의 발전을 맞이하였다. 그 도시문화는 상류계급의 전형적인 표현이었으며, 상류계급이 관심을 쏟아 추구한 것은 평화를 표현하는 문학과 예술이었다. 말의 등에 올라탄 당나라 초기의 호전적인 귀족과 후기 중국의 우아하지만 다소 냉혹한 문관학자는 매우 큰 대조를 이루고 있다. 유교적인 문관은 문헌연구와 관료적 야망과 도덕적 격률의 자기 세계에 빠져, 책에 둘러싸인 채 꼬치꼬치 캐내길 좋아하고 있었다. 유교의 가치와 태도는 전보다 훨씬 더 우세한 지위를 확보했던 것이다.

11세기와 12세기는 강력한 신(新)유교의 부흥기였다. 여기서는 도덕적, 정치적 사상에 대한 과거의 제도가 모든 것을 포용하는 학문적 교의로서 최고의 이론이 되었으며, 14세기에는 공식적으로 정통이 되었다. 가족제도와 씨족제도는 유교의 행동규범과 더불어 대중 속에 널리 퍼졌으며, 중국사회는 철저히 유교화되었다.

이 시기의 중국의 전반적인 모습은 특히 정치적 제도에 있어서 놀라울 정도의 지속과 안정을 유지했다는 점이다. 절정에 이르렀던 독재와 절대주의의 경향과는 달리 정부의 기본 구조는 전 시대에 걸쳐 유지되었다. 물론 예외적으로 몽고족이 지배했던 원나라 때(1267~1368년)는 약간 틀에서 벗어난 시기가 있었지만, 법개념과 정당한 절차는 동일하게 유지되었고, 과거제도는 전보다 더욱 강화된 형태로 1905년까지 존속되었다.

중국이 영토를 확장한 시기는 이국 출신의 왕조가 중국을 지배한 시기와 일치한다. 송(宋) 왕조(960~1279년)는 나약하고 방어적이었으므로, 결국은 중국의 북부를 정복자들에게 내 주어야 했다. 그 이후의 송은 남송(南宋, 1126~1279년)이라 불린다. 몽고족 치하에서 위대한 칸이라 불리는 몽고족의 통치자는 북경(北京)을 거처로 정했다. 그는 명목상으로 몽고세계제국의 다른 지역에 대해서도 최고 주권을 행사했다. 그래서 쿠빌라이도 더 멀리 정복하려는 야심적인 정책을 착수하였다. 명(明) 왕조(1368~1644년) 치하에서는 다시 중국 본토로 거의 축소되었다.

반면에 북동으로부터 내려온 만주족 정복자들이 세운 마지막 왕조 청(淸, 1644~1912년)은 다시 그 위력을 중앙아시아의 초원지대로 확장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이 초원지대는 오래 전부터 이슬람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청의 치하에서는 중국이 티베트와 몽고 부족의 대부분에 대해 종주권을 행사함으로써, 라마교가 지배하던 곳까지 결국 손아귀에 집어넣었다.

그러나 18세기 후반부터 경제적 침체와 인구의 극적 팽창 등의 이유로 쇠퇴의 길로 접어든 중국은, 19세기에 들어서자 만연된 타락과 반란이 갈수록 심화되어 불안정한 국가가 되었다. 중국이 서구의 확장에 의한 충격에 직면하게 된 것은 그러한 내적인 위기 상황 때문이었다. 그와 결부된 압박 아래서 과거의 질서는 와해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의 전반에 걸쳐 불교는 끊임없이 기울어져 가고, 보편적 교의로서 유교가 부활되고 체계화되면서 상류계급의 생활을 지배하게 되었다. 이 신유교의 정통은 과거제도의 기반이 되었고, 문관의 표준적 이념이 되었다. 그리고 중국 고대의 전통으로 복귀하려는 경향이 고조된 것이 불교가 쇠퇴한 또 다른 요인이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신유교의 체계화는 불교의 영향에 힘입은 바가 많았다. 중국불교의 다양한 종파들 속에서 전개된 가장 근본적인 형이상학적 개념들의 일부는 그 형태가 사회화되고 정치화되기는 하였지만, 새로운 유교 속으로 통합되었던 것이다. 유교는 단순히 인계된 것이 아니라, 그 경쟁 상대인 불교가 취한 가장 강력한 입장의 일부를 소화함으로써 발전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불교의 가장 큰 공헌은 현대에 이르기까지 중국인의 문화를 지배하게 될 신유교의 이념을 형성하는 데 도움을 준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중국에서 불교의 전반적인 쇠퇴가 양적인 면에서 곧바로 나타나지는 않았다. 통속종교는 언제나 그래왔듯이 일반인들 사이에서 번성하였다. 일반인들 사이에서 갈라져 나간 종파들은 때때로 매우 활동적이었다. 이들 중에는 간혹 질적인 면에서 선동적인 유형이 있었고, 이런 유형은 몽고족의 지배를 전복시키는 데 도움이 된 종교적 모반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교단의 규모는 좀처럼 축소되지 않았고, 사찰과 사원은 계속 설립되었다. 대규모의 사찰이나 사원에 대한 황실의 후원이 끊기는 예는 별로 없었다.

그러나 불교의 쇠락은 무엇보다도 먼저 지식인 계층에서 비롯 되었다. 지식인 계층과 승단에 대한 사회적 존경심의 하락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나타났다. 공식적인 포고문이나 이보다 약한 차원의 가훈과 씨족의 규율에서 불교를 폄하하고, 대중적인 책에서는 흔히 승려들을 탐욕스럽고 무지한 인물로, 사원을 도덕적으로 타락한 곳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세 가지의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였다.

첫째, 지식인 계층이 승려가 된 예는 극히 드물었고, 교단의 지위는 하락하였다.

둘째, 교단은 더욱더 교양 없는 대중의 요구에 따라 변질되었다.

셋째, 진지한 경전연구와 학문활동을 좌절시켰다.

그리고 또 다른 요인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인도와 중앙아시아에서 불교가 소멸한 것이었다. 이로써 중국에서의 외국 전법사의 활동도 종식을 고했다.

중국에서의 마지막 번역활동은 10세기 말에 일어났는데, 인도의 승려와 중국의 보조원으로 구성된 공식적인 번역관이 이 작업을 맡았다. 당나라시대의 불교를 다시 부흥시키고자 시도하였지만, 신심에 바탕을 두지 않은 시도여서 번역작업의 위대한 전통은 종말에 이르렀다.

그러나 중국불교의 교의적인 불모 상태는 수와 당의 시대에 발전했던 종파 중 선종과 정토신앙을 제외하고 대부분 소멸한 데서 보다 여실히 나타난다. 그러나 이 두 종파도 절충되어 그 특색을 잃어갔다. 그리하여 유교와 불교와 도교의 ‘3교 통합’이라는 과거의 관념이 크게 대중성을 확보하였다.

특히 명과 청의 치하에서는 그러한 절충주의적 이론을 재가 신도들이 발전시킨 경우가 많았다. 교단의 역할이 사양길로 접어들자 재가 신도의 역할이 보다 중요시되었던 것이다. 무수한 종교적 집단이나 모임이 있었고, 승려들이 결혼식이나 장례식에서 조상들의 공덕을 기리는 의식을 집전하고 기우제를 지내거나 악령을 내쫓는 일도 맡음으로써, 불교는 가정생활과 밀착하게 되었다.

가장 대중적인 축일 중의 하나로 음력 7월 보름날에 행하는 백중(百中)이 있다. 이 날은 승려와 재가 신도가 함께 행사를 통하여 얻은 공덕을 고통에 시달리는 모든 사람들을 구하는 데로 돌리는 의식이었다. 그렇게 건전한 행위는 다른 생물에게도 확대되었는데, 생물을 사서 자유롭게 풀어주는 방생(放生)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많은 대사원들은 이러한 목적을 위해 연못을 갖추기도 하였다.

중국에서의 종교정책이 언제나 변함없이 견지했던 특징은 임의적인 통제와 후원을 적절히 구사하는 것이었다. 몽고족의 치하에서는 예외가 있었지만, 대규모의 박해는 더 이상 자행되지 않았으며, 간혹 주술적으로 보호받겠다는 생각과 결부된 황제의 후원도 결코 과도한 정도에 이르지는 않았다.

그리고 티베트의 라마교가 몽고에 전해졌는데, 원과 명, 청 등의 세 왕조는 정치적인 이유에 근거하여 한결같이 라마교를 광범위하게 후원하였다.

이 시기의 전반에 걸쳐서 몇몇 종파들은 비밀스럽고 파괴적인 성격을 드러내기도 하였는데, 유명한 백련사(白蓮社)가 이에 해당한다. 구세적 성격을 지니고 12세기에 성립된 백련사는 원나라 말기의 반몽고 반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이후의 몇 세기에 걸쳐 온갖 분야의 비밀결사로 분파하였는데, 그 중의 일부는 오늘날까지도 존재한다.

명과 청시대에는 그러한 운동의 종교적 성격이 훨씬 더 두드러졌다. 용감하고 영웅적인 승려들이 비밀결사를 주제로 한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 되고, 투쟁하는 승려가 통속적인 이야기 속에서 즐겨 다루어졌던 것은 전혀 근거 없는 허구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특히 하남(河南)에 있는 소림사(少林寺)의 승려들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들은 권법(拳法)이라 불리는 독특한 유형의 무예를 수련하였으며, 아직까지도 전수되고 있다. 이들의 이야기는 아직도 전설적으로 회자되는 유명한 예화 중의 하나이다.

그 밖에도 불교의 구세주의에 영향을 받은 폭동들이 명과 청 왕조를 괴롭혔다.

19세기의 전반에 있었던 대규모의 반란들은 실제로 백련교의 모반이라는 대중봉기로 출범하여 청 왕조를 거의 와해시킬 정도로 거셌다. 정부가 이 반란을 진압하는 데 10년이 걸렸다.

이러한 현상들은 불교가 사원 내부에서 뿐만 아니라 광범위한 대중 속에서 실천적으로 작용하였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청나라시대의 말기에는 불교가 흡수, 변형된 마지막 단계를 보여 준다. 이는 성인(聖人)들과 그들에 관한 이야기에 대해 중국인들이 전형적으로 발전시킨 몇몇 표현 속에서 가장 여실히 나타난다. 무시무시한 고통에 시달려야 하는 불교의 지옥은 통속적인 종교가 즐겨 찾는 주제가 되었고, 불교의 신화에서 사후세계의 심판관인 염라대왕은 자연스럽게 청나라시대 전형적인 관리의 모자와 옷을 입은 중국인 치안판사의 모습을 취했다.

본래 아미타불의 보처보살인 관세음보살은 여성의 모습을 취하여 일종의 불교적 여신처럼 끝없이 대중화되어 갔다. 즉 온갖 종류의 재앙과 위험과 질병으로부터 사람들을 구제하고, 자식을 갖게 하여 후손을 번창케 해 주리라고 믿었다.

또한 불교적 구세주인 미륵은 놀라운 모습으로 변형되었다. 대중들의 인상 속에서는 미륵이 ‘포대(布袋)’라 불리는 10세기의 괴짜 승려와 동일시되었다. 당시 몇몇 괴짜승들은 자신이 미륵의 화신이라고 자처하고 있었다. 그 결과 초기의 많은 조각상에서 표현된 홀쭉하고 위엄 있는 모습이, 포대를 옆에 차고 누구에게나 호감 있게 싱글거리면서 친숙하게 웃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러한 경우에 성인들은 전형적으로 중국인의 모습을 취했다. 그러나 이국적 성격이 강조된 다른 형상도 있었다.

중국에 선을 전한 인도 출신의 달마는 검은 피부에 무서운 얼굴을 지닌 이방의 선사로, 커다란 눈을 굴리는 사나운 표정으로 묘사되었다.

그리고 나한전(羅漢殿)에서 보듯이, 중국사람들은 종교의 수호자라고 믿은 부처님의 주요 제자들에 대해 이국풍의 모습을 더욱더 강조하였다. 나한들의 활약상과 관련하여 그들에 대한 신앙이 발전하여 나한신앙으로 자리 잡기도 하였다.

선종은 보다 현학적인 수준에서 나아갔지만, 이 역시 교의와 제도의 양면에서 많이 변하였다. 송나라시대 이후 선은 더욱더 형식화되었고 성문화되었다. 역설적으로, 무언(無言)의 교의가 거대하고 고도로 전문화된 문헌을 발전시켰던 것이다. 이것이 현대의 시와 회화에 깊이 영향을 끼쳤던 심미화된 구두선(口頭禪)이다.

선종사원은 수백 명의 승려들이 거주하고 복잡한 승단 내의 계급을 갖춘 커다란 기구가 된 예도 종종 있다. 선방(禪房)을 중심에 배치한 그러한 사원들에는 정신집중을 위해 완전히 형식화된 기술로서 선이 실수(實修)되었다. 그리고 이 기술에는 온갖 세부사항이 정확히 규정되었다. 즉 선사와 수행자가 나누는 질의응답, 신체의 자세와 동작, 일상의 활동 계획 등이 포함되어 있다. 심지어는 식사도 완전히 의식화(儀式化)되어 있다. 또 북, 종, 목탁, 운판 등의 소리를 통한 신호법으로 이들을 규정하였다. 사회적 행위의 기준으로서 예(禮)는 극히 의례화된 행동규범 속에 외면으로 표현되었던 것이다.

정기적인 수계는 장엄하고 집합적인 의식을 통하여 이루어졌는데, 이는 보통 ‘계단(戒壇)’에서 사원의 원장과 전문화된 다른 행정승들에 의해 집전되었다. 전통적으로 전해 온 250계를 한꺼번에 받아들이고 정식 승려가 된 후, 당사자들은 흔히 대승의 이념에 따라 모든 중생의 안녕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자신들의 결심을 상징하는 보살의 원(願)을 세우기도 하였다. 의식에 참석한 경건한 재가 신도들도 이러한 서원을 받아들이기도 하였다.

수계를 통해 정식 승려가 되면, 당사자는 인쇄된 수계증을 받았다. 이 절차는 이미 당나라 때부터 실시되어 왔다. 그런데 이는 본래 교단을 보다 잘 통제하기 위해, 관료제도에 의해 강요되어 온 것이었다. 승려들은 일종의 승려증으로 이 문서를 지니고 다녀야 했다. 그리고 이 문서는 정식 승려가 되도록 자신을 이끌어 준 은사의 이름과 자신이 속하는 정신적 계위를 나타내는 다른 특기 사항을 기재함으로써, 종교적 기능을 발휘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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